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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history

"내 뱃속에서 세 개의 제국과 천년의 역사가 나왔느니라"... 소르칵타니 베키

13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아니 사람

몽골 황량한 초원에서 태어나 타고난 혜안과 지혜로 징기스칸 家 최후의 승자되다

 

소르칵타니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하다.

어쩌면 징기스칸을 직계 조상으로 여기는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몽골계 국가를 제외한 全세계인에게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여인이야말로 13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힘 센 여인, 아니 사람이었다.

 

소르칵타니는 징기스칸의 사후, 그 피비린내나는 후손들의 싸움에서 오직 지혜와 끈기로 최후의 승자가 됨으로써 그녀의 아들들을 중앙아시아페르시아지역, 그리고 광활한 아시아 대륙의 패자로 이끌었다.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4남), 일 칸국의 창시자 훌라구(6남), 몽골제국의 4대(代) 칸 뭉케(장남), 몽골제국 5대(代) 칸 아릭 부케가 그의 태에서 나왔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1190년 생으로 케레이트 부족의 지도자 옹칸의 동생인 자하 감보바이시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부족의 유력한 집안 귀한 딸이었던 셈이다.

 

포로로 끌려와 징기스칸의 며느리되다

 

징기스칸몽골지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아직 대칸에 오르기전- 케레이트 부족이 그에게 투항했을 때 소르칵타니도 포로로 잡혀왔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도로 알려져있다. 문맹이지만 매우 영특했다고 한다. 그녀의 어떤 점을 눈여겨 봤는지 모르겠으나 징기스칸은 소르칵타니를 막내 아들 톨루이의 아내로 삼았다.

전리품처럼 잡혀왔지만 아마도 톨루이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고 아버지에게 졸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르칵타니의 인생이 그토록 질풍노도처럼 전개된 것은 1227년 징기스칸의 갑작스런 죽음에서부터 비롯됐다. 

아시아북부 평원에서 중앙아시아까지를 모조리 정복한 불세출의 정복왕 징기스칸은 서역탕구트제국을 정복하기 며칠 전, 초원에서 느긋하게 야생마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징기스칸의 회색 명마는 그날 따라 웬일인지 달려드는 야생마들에게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 치다가 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를 땅바닥에 메다 꽂고 말았다.

그는 이때 입은 부상으로 그 해 여름이 가기 전 원정지의 야영에서 숨을 거뒀다.

 

징기스칸의 죽음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칸의 집안은 후계구도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엄청난 혼란이 몽골제국을 덮쳤다. 징기스칸이 죽고 2년이 지나도록 대칸이 될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뭔가 치열한 암투와 복잡한 사정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톨로이의 첫번째 부인...4명의 아들 출산

 

소르칵타니징기스칸의 막내 톨루이의 첫 번째 부인으로 톨루이의 11명의 아들 중 4명을 낳았다. 이 네 명의 아들은 장차 몽골페르시아·이라크, 중국 원나라의 대칸 또는 황제로 등극한다. 네 명의 아들들이 각각 다른 나라의 황제에 오르는 모습을 본 여인은 인류 역사에 소르칵타니가 유일할 것이다.

 

케레이트 부족의 포로로 잡혀와 어쩔 수없는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톨루이를 극진히 내조했다.

사실 그녀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이미 이 집안은 세계 최강이자 최고 부자 집안이었기에, 포로로 잡혀온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유라시아를 장악한 ‘황금 가족’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살신(殺身) 혹은 음모(陰謀)?

 

전통적으로 막내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을 물려주는 몽골의 관습에 따라 톨루이는 많은 재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물자도 그렇고 병력(兵力)도 그랬다.

징기스칸은 생전에 막내 톨루이를 가장 사랑해 그에게 대칸을 물려주려 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징기스칸 사후 몽골의 족장들은 톨루이를 대칸으로 선출하려했다. 하지만 1229년 쿠릴타이에서 톨루이는 셋째 형 우구데이를 적극 밀어 대칸에 오르게 했다. (1227~1229년의 2년간을 톨루이의 섭정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쿠릴타이: 몽골의 전통적인 의사결정 방법. 모든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쿠릴타이를 통해 결정됐다. 심지어 왕위 계승권까지도

 

하지만 우구데이는 자신을 지지해 준 동생 톨루이를 심하게 견제했는데, 소르칵타니는 남편과 우구데이가 불편한 관계면 제국을 위해서도, 집안을 위해서도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일단은 그저 바짝 엎드려 있으라고 조언했다.

 

우구데이는 어마어마한 영토와 세계최고의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자수성가하지 못한 이 대칸은 이내 술과 쾌락에 빠져들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1231년 우구데이톨루이와 함께 중국 북동부에 자리한 금(金)나라 정벌에 나선다.

정벌을 떠난 지 3년째인 1234년, 몽골은 마침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정복에 한걸음 다가선다.

기쁜 마음으로 남편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던 소르칵타니는 한 전령으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된다.


"내 남편이 죽다니 무슨일인가?"

 

"그것이....금나라를 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칸(우구데이) 께서 병을 얻어 말을 못하게 됐으며 급기야 죽기만 기다릴 지경이 됐습니다.  대칸에게 불려온 무당이 말하기를......"  내용은 이랬다.

 

우구데이톨루이금나라를 점령할 때 금나라 백성과 군인을 너무 많이 죽여 땅에 피를 많이 적셨다.

금나라 땅 수호신들의 저주가 걸렸다.  무당은 대칸과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저주받은 물을 마시고 대신 죽어야 한다고 간했다.

 

이때 톨루이가 형을 구하기 위해 자청해서 독물을 마시겠다고 나섰다. 자신이 그 저주를 다 받겠노라고 하면서...

 

그렇게 40세에 불과했던 톨루이는 저주받은 물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덕에 대칸은 살아났다.

 

이런 이야기였다.

 

소르칵타니는 이내 사태를 알아차렸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그녀는 샤머니즘이나 무당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전부터 남편을 경계했던 대칸의 음모다. 대칸과 무당이 짜고 남편을 독살한 후 그런 소문을 낸 것이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소르칵타니는 자식들을 위해 침착함을 유지해야했다.

그러나 그 소문을 곧이 곧대로 믿는 몽골 백성들 사이에서 의리와 민족혼의 상징으로 톨루이를 숭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소르칵타니와 그 자식들에게 나쁘지 않은 현상이었지만 우구데이로서는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극심한 견제와 고통속에서도 소르칵타니는 남편 톨루이금나라 정벌에서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일대를 평정했음을 들어 북중국동(東)몽골 일대를 울루스(다스리는 영토)로 달라고 주장해 이를 관철하는 당찬 면모를 보여준다.

 

절치부심(切齒腐心)속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세월

 

원정에서 돌아온 우구데이는 제수인 소르칵타니를 점점 더 견제하기 시작했다.

몽골 백성들 사이에 도는 톨루이에 대한 신적인 숭배도 몹시 거슬렸다.
“우리의 관습에 따라 당신을 내 장자인 구육에게 시집보낼 테니 명을 받드시오"

 

구육우구데이의 아들이니 곧 톨루이의 조카. 소르칵타니구육에게 시집보내려는 우구데이에게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그는 톨루이 가문의 모든 의사결정에는 슬기로운 소르칵타니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 제수지만 정말 총명한 여자야…. 가만히 있는 듯해도 저 여인의 지혜는 환한 빛처럼 사방을 밝히는 힘이 있다. 저 여자를 내 장남인 구육에게 시집보내 내 집안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야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속셈....톨루이 가문은 징기스칸으로부터 가장 값진 재산과 병력을 물려받았기에 소르칵타니구육의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구데이가에 귀속돼 버리게 된다.

 

소르칵타니는 냉철하게 대답했다.

“대칸이시여. 남편은 대칸을 위해 죽어 만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대칸의 은혜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평소에 자신이 죽더라도 아이들이 자라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개가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칸을 위해 숨진 남편의 고귀한 유지를 받들고자 하오니 이 뜻을 저버리지 말아 주옵소서.”

 

우구데이소르칵타니의 완곡한 거절에 머뭇거리게 되는데 여기 더해 눈치 없는 장남 구육이 “아버님! 숙모의 판단이 맞는 말이라고 판단됩니다. 결혼을 무기한 늦춰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구육은 평소 숙모에게  어떤 경외감이나 카리스마를 느끼고 있었기에 소르칵티니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꽤 거북함을 느꼈던 것 같다.

 

톨루이 독살에는 성공했으나 소르칵타니를 묶어 놓는 것에는 실패한 우구데이. 그는 다른 계략을 냈다.

톨루이 수하에 있던 3천 군호를 내 둘째 아들 고단의 휘하로 옮긴다.”
톨루이 가의 무력을 흡수해 손발을 꺾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톨루이 휘하의 장수들이 크게 반발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분부를 내려주시면 우리가 대칸을 제거해 버리겠습니다. 아무리 대칸이라도 이치에 맞는 일을 해야 충성할 것이 아닙니까?”
소르칵타니는 이 충직한 부하들을 달랬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그대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시오. 고단 휘하로 들어가서 그에게 충성을 다하세요.

다만 마음 속으로는 그대들의 주군 톨루이와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시오.”
그녀는 휘하 3천 군호를 고단에게 보냈다. 군사적 기반을 빼앗긴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로써 우구데이의 둘째아들 고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게 됐다. 

 

우구데이의 죽음과 몽골 제패의 서막

 

우구데이는 늘 술에 절어 살았다. 그의 아내들 중 가장 현명하고 깐깐한 아내 투레게네우구데이가 술에 취해 정무를 볼 수 없을 때마다 똑 부러지게 일들을 처리해 내곤 했다고 한다.

우구데이는 점차 제국의 주요결정 사항을 투레게네에게 맡기게 된다.

 

소르칵타니는 '투레게네야 말로 남자 이상으로 똑똑하고 머리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잔인하고 냉정한 여자야. 자신의 야심과 뜻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사람이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났다가는 몰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처럼 나서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징기스칸이 죽기 전, 그의 아들·손자들은 모두 몽골의 지휘관으로서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며 전장에서 지냈기 때문에 남자들이 없는 제국 내의 복잡한 행정은 대부분 징기스칸의 며느리들이 처리했다. 그 거대한 제국의 방대한 업무를 처리해 낸 경험이 있는 징기스칸 가의 여인들은 그 방면에 있어서는 남편들을 능가했다.

특히 우구데이의 아내 투레게네의 재능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1241년 우구데이는 방탕한 생활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나는 이제 얼마 안 가 죽을 것 같다. 내가 죽으면 당분간은 아내 투레게네가 나라를 다스리라. 공식 섭정으로 인정하겠다.”
우구데이가 시름시름 앓다 죽자 섭정이 된 투레게네는 자기의 아들 구육을 대칸에 올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게 된다.

 

우구데이는 생전에 장자 구육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래서 대칸의 자리를 아들들을 넘어 손자들 가운데 한 명에게 주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투레게네는 그런 우구데이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따위 미친 소리 하려면 빨리 죽기나 했으면! 내가 섭정의 자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구육에게 대칸의 자리를 물려 줘야겠다.”

냉철한 투레게네도 자기가 낳은 자식 구육에게는 어리석을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구육은 누가 봐도 대칸의 재목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우구데이가 죽고 한 동안 몽골이 혼란스러웠을때 소르칵타니가 조용히 명망을 쌓은 계기가 있다. 우구데이 사후 몽골의 왕족들과 유력자들은 재물을 쌓으려고 패부(牌符)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패부란 정부가 증명하는 일종의 보증서로 출진(出陣) ·무역 ·역전(驛傳) ·성문출입 등을 보장했는데 이를 남발해 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극심한 폐단을 낳았지만 소르칵타니만 패부를 남발 하지 않아 백성들의 명망을 얻었다.

 

구육, 대칸에 오르다
 

투레게네는 섭정에 오르자 바로 구육을 대칸 자리에 올리려했다. 몽골의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를 즉각 소집한 것이다. 그러나 정족수를 채울 수가 없었다. 몽골의 핵심 귀족들에게 인심을 얻지 못한 구육은 대칸 자리에 오르는 꿈을 당분간 접어야했다.

 

투레게네는 뛰어난 판단력으로 그 큰 나라의 행정을 무리없이 이끌어내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아들이 대칸에 오르기까지 차분하고 치밀하게 장애물을 치워나갔다. 

전임 장관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해임하며 자기 사람들을 요직에 심어 놓았다.

이런 과정 끝에 1246년, 투레게네는 마침내 아들 구육을 대칸의 자리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투레게네 시대의 종말

 

섭정 몇 년 후부터 투레게네는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서 데려 온 여종 파티마를 심복으로 삼았다. 투레게네는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고자질을 들으며 그녀가 험담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냈다.

구육은 어머니의 심복 파티마를 아주 미워했다. 구육은 대칸에 자리에 오른 뒤에도 계속되는 어머니의 간섭이 싫었다. 구육투레게네의 끊임없는 '감나라 콩나라'의 원인을 파티마로 보고 그녀를 제거하기로 했다.

평소 파티마를 미워하던 자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파티마의 죄상을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구육파티마를 소환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파티마를 감싸고 돌며 소환에 불응하도록 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되풀이 된 어느 날, 구육파티마를 강제로 소환, 그녀의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꿰매고 담요에 말아 강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투레게네가 입은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문불출하던 투레게네가 몇 달 후 사망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후세의 연구자들은 구육 일파에 의한 살해로 간주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구육은 광분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소르칵타니의 모든 재산과 그 휘하의 군사를 접수해 버렸다. 과거에 자신이 대칸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도 모조리 처형했다. 그는 머나먼 서쪽 카스피해 북부와 불가리아 지방 사이에 있던 킵차크 칸국을 다스리던 사촌 바투를 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바투를 제압하고 돌아와서 아직도 백성들 가운데 신망을 받는 톨루이 일가 즉, 소르칵타니와 그녀의 아들들도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소르칵타니는 ‘이제 움직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명철한 판단과 전광석화같은 움직임으로 제국의 세력판도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과부들의 전쟁

 

소르칵타니는 물밑에서 움직였다. 그녀는 킵차크 칸국에 전령을 보내 “구육바투 칸을 기습하려 하니 단단히 준비하라”고 일렀다. 수시로 바투와 연락을 취하며 강력한 우방을 맺었다.


그러나 구육은 서방 원정길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인이 불분명한 죽음을 당했다. 건강했던 구육은 그때 나이 43세였고 대칸에 오른 지 불과 18개월 만이었다. 바투가 자객을 보내 구육을 죽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소르칵타니가 직접 사람을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구육을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르칵타니는 이제 구육의 미망인 오굴 카이미시와 싸워야했다. 오굴은 죽은 남편 대신 섭정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소르칵타니는 자기 자식인 뭉케를 몽골의 대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멀리 바투와 손을 잡았다. 바투는 자신을 치러 오는 구육의 기습을 알려 줘 자기의 왕국을 구한 소르칵타니에게 기꺼이 협력했다.

 

이미 죽은 투레게네나 현재의 권력자 오굴 카이미시 모두 소르칵타니가 잠자코 있는 줄 알았지만, 소르칵타니는 바투와 지속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어왔을 뿐 아니라, 몽골의 유력부족 족장들과 군사 실력자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예를 갖춰가며 친교를 맺어왔다. 

이런 '은밀한 소통'은 소르칵타니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는 힘의 원천이 된다. 

 

1251년 바투텐샨 산맥 근처에서 뭉케몽골의 대칸으로 인정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러나 우구데이가와 차가타이가의 왕자들과 오굴 일파가 연합해 강하게 반발하며 쿠릴타이 참가를 거부했다.

정족수를 채울 수 없었기에 뭉케의 대칸 등극은 실패했다.

소르칵타니는 여기서 기발한 작전을 감행한다.

“위대한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칸으로 선출됐고, 죽어서 묻힌 몽골민족의 성지(지금의 몽골 헨티주)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할 것을 제안합니다.”

 

오굴 일파 등은 이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징기스칸이 묻힌 성지에서 개최되는 쿠릴타이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원칙이 징기스칸가에는 있었던 것이다. 징기스칸의 종손 바투가 밀어주는데다 소르칵타니가 평생 인심을 쌓아 온 대다수의 대의원들은 뭉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소르칵타니의 맏아들 뭉케는 41세의 나이에 대 몽골제국의 4대 대칸에 오른다. (1251년)

오굴과 그 일가는 이때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오굴 카이미시는 벌겨벗겨진 채 소르칵타니 앞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고 하니, 소르칵타니의 숨겨진 냉혹함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소르칵타니뭉케가 대칸에 오른지 몇달 지나지 않은 1252년 2월 몽골의 신년 축제중 병으로 사망했다.  

 

소르칵타니의 세상

 

징기스칸과 그의 후손이 이루어 놓은 대부분의 영토와 권세, 영광이 이제 완전히 톨루이가로 옮겨왔다.
그녀는 서쪽의 바투와 잘 협력하고,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투레게네오굴에게 불만이 많은 몽골의 유력자들과 차근차근 친분을 쌓아가며 자신이 낳은 네 아들의 미래를 탄탄히 다져 놓았다.

살엄음 위를 걷는 위태로움과 적의 칼끝이 항상 등을 겨누고 있는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세월을 소르칵타니는 믿을 수 없는 침착함과 판단력으로 극복해냈다.

 

첫째 아들 뭉케가 몽골대칸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막내 아들 아릭 부케몽골제국의 5대 대칸에 올랐다.

셋째 쿠빌라이는 중국에 원나라를 세워 황제에 올랐으며, 훌라구는 페르시아(이란이라크 지역) 지방에 일 칸국을 세워 역시 대칸에 올라 중동 지역을 호령했다.

그녀의 아들들이 튀르키예이란, 이라크, 시리아서 아시아중앙아시아 전역, 남으로는 송나라를 점령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점령하며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형성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강력한 제국이 전쟁 포로 출신이었던 소르칵타니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기다릴 줄 알고, 사람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하는 지, 움직일 때와 물러 설 때를 알았다. 죽은듯 웅크리고 기다리다가도 나서야할 때는 번개처럼 과감히 움직였다.

 

그런 과단성과 판단력이 그녀와 자식들을 ‘황금가족 중의 황금 가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에 대한 汎 몽골제국 측 기록을 보자면.....아들들이 유라시아의 지배자가 된 후, 그들의 무용담을  제멋대로 과장하면서 온갖 신화와 채색을 더해 소르칵타니를 신격화했음직도 했건만, 그런 '용비어천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에 의해 중국식 존호 장헌성태후(莊獻聖太后), 시호 현의장성황후 (顯懿莊聖皇后)가 추증됐을 뿐이다.

 

오히려 당시 몽골에 점령당했던 중앙아시아 쪽 학자들의 평가는 후하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학자 이븐 알 이브리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소르칵타니 같은 여자가 이 세상에 한 명만 더 있다면 나는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고 장담하겠다.”

 

역사서 '집사' 로 유명한 라시드 알딘도 "그의 아들들이 몽골 제국의 대권을 맡은 것은 소르칵타니의 책략과 능력에 바투의 도움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톨루이가 죽은 후 소르칵타니가 보인 노력과 헌신, 능력과 지능의 열매를 맺은 것"이라는 평가를 남겼다.